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최근에 «나의 해방일지»를 봤다. 드라마를 원래 잘 안보는데 나의 해방일지는 다른 드라마들과는 결이 다른 것 같았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한 1-2년 전에 2~3화 정도까지는 봤다가 너무 우울해서 중간에 껐던 기억이 있다. 흔히 우리가 “드라마틱하다” 할때는 말도 안되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를 말한다. 드라마는 우리를 현실 도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드라마는 현실과는 다른, 각본에 짜여진대로 배우들이 움직이고 대본대로 말하니까. 작가의 입맛대로 드라마속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속 인물들은 현실에서는 불가능, 또는 힘든 연애 서사 그리고 삶을 살아가니까.

내게 나의 해방일지는 사람 냄새나는 드라마였다.

사람 냄새나는 드라마가 뭐냐고 물어볼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람 사는 이야기,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만한 서사들을 포괄하고있다. 마치 등장인물들이 실제 내가 사는 세상 어딘가에 정말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드라마다. 내게 이런 드라마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드라마가 바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었다. 이 드라마도 시즌 1, 2를 다 챙겨봤을 정도로 나에겐 인상 깊었다.

나의 해방일지는 내 가치관에서 하나의 가치를 더 추가했을 만큼 많이 고마운 드라마다. 드라마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처음 겪어본다. 그것이 어떤 가치였는지는 점점 얘기 해나가겠다.


추앙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깐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깐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추앙이라는 단어를 사실 이 때 처음 알았다. 사전적 의미의 추앙이란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

그리고 드라마가 말하는 추앙이란

기준 없이 누군가를 응원하는 것.

우리는 여기서 꼭 기준 없이라는 키워드를 봐야 한다. 우리가 추앙하게 될 사람은 너무나도 고귀해서 클럽을 가든, 어떤 성격이든, 무슨 일을 하든… 그런 기준 없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받드는 것이다. 아무 기준 없이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아프지 않기를 바라고, 모든 일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

이름이 뭐든, 세상 사람들이 다 욕하는 범죄자여도 외계인이어도 상관없다고 했잖아.
근데 그게 뭐? 난 아직도 당신이 괜찮아요. 그러니까 더 가요. 더 가 봐요. 아침 바람이 차졌단 말예요..

김지원의 추앙이라는 단어 선택은 너무 나도 의미가 깊다. 일이 고된 탓에 누구라도 내 곁에 있어주면 하는 마음에, 누군가가 이런 나약하고 볼품없는 자신을 기준 없이 대해주면 좋겠어서, 그리고 김지원 본인도 누군가를 기준 없이 대하며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싶어서이다.

김지원은 구씨에게 추앙 하라하고, 본인도 구씨를 추앙하겠다고 한다.

혹시 내가 추앙해줄까요? 그쪽 워진 적이 없는 것 같아서. 필요하면 말해요.

추앙은 결국 김지원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누군가가 나를 기준 없이 사랑해주니, 마음은 채워졌고, 그러므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제 김지원은 자신을 사랑할 줄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자격이 생겼다, 그리고 그 때 마침 구씨가 김지원에게 찾아온다.

"네. 여보세요?"
"오랜만이다. 나 구씨."
"오랜만이네."
"어떻게 지내시나? 그동안 해방은 되셨나?"
"그럴리가."
"추앙해 주는 남자는 만나셨나?"
"그럴 리가."
"보자."
"안 되는데.."
"왜?"
"살쪄서... 살 빼야 되는데..."
"한 시간 내로 살 빼고 나와."

나도 누군가를 깊게 추앙 하고싶다. 내 주변 사람들, 내 사람들은 전부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나였으면 한다. 그들의 삶의 중심에 내가 있을 필요는 없지만 내가 힘이 되었으면 한다. 그럼 마치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으니까.

나는 지금껏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아왔다. 이제 베풀고 싶다. 과거에 베풀지 못했던, 마음을 많이 주지 못했던 내가 후회되지만 나의 해방일지는 나에게 내 사람들을 챙기는 법을 알려줬다. 너무 고마웠던 것들 투성이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천히 시작해보고 싶다.

내가 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나는 그들을 채워주고 있을까 아니면 충분히 채워주지 못했을까. 그들에게 나는 고마운 사람일까. 나라는 사람의 가치는 그들에게 어느 정도일까.


사랑

나의 해방일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초점을 더 맞췄을지라도 사랑에 대해서도 야기한다. 김지원과 손석구의 연애가 다른 로맨스 드라마만큼 뜨겁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성숙한 연애는 잘 보여준 것 같다.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연애다.

내겐 좋았던 몇몇 대사들이다.

당신은 내 머릿속의 성역이야. 결심 했으니까. 당신은 건들지 않기로.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고,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 하지 않을 거고.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라고. 당신이 미워질 것 같으면 얼른 속으로 빌었어.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기를. 숙취로 고생하는 일이 하루도 없기를.

나를 떠난 모든 남자들이 불행하길 바랐어.
내가 하찮은 인간인 걸 확인한 인간들은 지구상에서 다 사라져버려야 되는 것처럼 죽어 없어지길 바랐어.
당신이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길 바랄 거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길 바랄 거야.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 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그런 보복은 안 해요. 남자랑 사귀면서 조용한 응징과 보복 얼마나 많이 했게요. 당신 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세 살 때, 일곱 살 때, 열아홉 살 때. 어린 시절에 당신 옆에 가 앉아서 가만히 같이 있어주고 싶다.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뭔 짓을 못 해?

이 사람 날 완전히 망가지게 두진 않는구나. 날 잡아주는구나.

보고 싶었다, 무진장. 말하고 나니까 진짜 같다.
진짜 무지 보고 싶었던 거 같다.


해방

작중 김지원은 해방 클럽을 창설하고 어떻게 해방되고 싶은지를 담은 해방일지를 작성하게 된다.

우리 진짜로 하는 건 어때요? 해방클럽. 해방이 하고 싶어요. 해방되고 싶어요. 어디에 갇혔는지는 모르겠는데, 꼭 갇힌 것 같아요. 속 시원한 게 하나도 없어요. 갑갑하고, 답답하고,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김지원은 인간관계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한다. 김지원은 회사원이다. 여러모로 지쳐있고 상사에게 치이고, 직장 동료들에게 치인다. 이 모든것은 인간관계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인데 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가장 어려울까?

인간관계는 우리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나를 무너뜨린다. 주변에 다들 잘난 사람들 뿐이니까. 분명 우리도 한번은 다른 사람들을 무너뜨렸던 적이 있을 것이다. 필자 같은 경에는 너무 나도 많다. 후회를 하기에는 부질 없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미래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된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괜찮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했던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어디서 답을 찾아야 될까?

작중 김지원이 해방되는 모습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아마 시작점은 “추앙”과 구씨일 것이다.


마치며

그래서 김지원은 해방되었을까?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에서는 해방이 된 것으로 그려진다. 김지원은 자신을 너무 나도 사랑하고 있었다.

나의 해방일지의 마지막 대사이다.

나 미쳤나 봐.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마음에 사랑밖에 없어. 그래서 느낄 게 사랑밖에 없어.

먼저 본인을 사랑하자. 그러고 나서, 본인이 사랑으로 넘쳐 흐를 때 쯤에서야 다른 누군가를 사랑으로 채워줄 수 있다. 이번 포스트의 서론에서 말했던 내 새로운 가치관이 나를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전전 게시글인 “불안을 읽고 나서”에서도 언급 하였듯,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나도 중요하다. 내 인생에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것인가? 내가 채워진 상태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면 그 사람은 더욱 사랑을 느낄 것이다.

아니면 무심코 만난 누군가가 당신을 채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채워졌으니 그 사람에게 받은 그만큼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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