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 of contents
소개
이번에 소개할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이다. 이 책을 이번년도 8월에 읽고 여운이 길게 남았었다. 여름에 읽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 책이 내 마음 어느 한 곳을 치유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왜 무라카미 하루키가 거장인지 읽으면서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펼친 날은 매미가 서서히 잠잠해 지고 밤에는 선선한 바람이 내 볼을 스쳤던 8월 말 즈음이다. 책은 강렬한 색깔을 띄고 있었다. 여름의 절정의 색깔인 진 녹색과 중간에는 여러 색 조합의 스트라이프가 있다. 영어로 대문짝만하게 MURAKAMI HARUKI가 적혀져 있다. 책의 제목보다 작가의 이름이 크게 디자인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거장임을 자랑 하듯 이름을 크게 박아 놓은 것일까?
책은 총 768쪽이다. 내가 읽었던 책 중에는 가장 길었다. 근데 완독하는데에는 채 4일도 걸리지 않았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틈이 나면 읽었었다. 그 때가 훈련 주간이라 12시간 동안 출근을 했었지만 일이 많이 없었기에 책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던 것 같다. 하루에 250페이지 정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여담으로 이 책을 읽었던 때 윤석열 대통령이 부대 방문을 했던 것도 갑자기 기억이 난다.
사실 이 책은 엄청 어렵다.. 많은 리뷰를 찾아보고 이동진 평론가의 해석을 보아도 도통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그래서 내가 마음에 들었던 문장들과 그에 대한 나의 생각들만 조금 적어볼까 한다.
내가 가장 좋았던 부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두 개의 다른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그렇지 않은 도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향한 주인공의 모험은 그의 여자친구 때문에 시작된다. 종종 여자친구에 대해서 묘사가 나오는데 이 묘사가 정말 말도 안되게 좋다. 지금껏 읽었던 소설 중에는 (영어든 한국어든) 미치도록 감명 깊었다. 같이 조금만 읽어보자.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그 여름 해질녘, 우리는 달콤한 풀냄새를 맡으며 강을 거슬러올라갔다. 아트막한 물둑을 몇 번 건너고,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서 웅덩이에서 헤엄치는 가느다란 은빛 물고기들을 구경했다. 둘 다 조금 전부터 맨발이었다. 맑은 물이 복사뼈를 차갑게 씻어내고 강바닥의 잔모래가 발을 감쌌다ㅡ꿈속의 부드러운 구름처럼. 나는 열일곱 살, 너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너는 노란색 비닐 숄더백에 굽 낮은 빨간색 샌들을 대충 쑤셔넣고 모래톱에서 모래톱으로, 나보다 조금 앞서 걸어갔다. 젖은 종아리에 젖은 풀잎이 달라붙어 근사한 초록색 구두점을 만들었다. 나는 낡은 흰색 스니커즈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너는 걷다 지친 듯 여름풀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작은 새 두 마리가 나란히 상공을 가로지르며 날카롭게 울었다.침묵 속에서 푸른 땅거미의 전조가 둘을 감싸기 시작한다. 네 옆에 앉자 왠지 신기한 기분이 든다. 마치 수천 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이 너의 몸과 나의 마음을 촘촘히 엮어가는 것 같다. 네 눈꺼풀이 한 번 깜박일 때도, 입술이 희미하게 떨릴 때도 내 마음은 출렁인다.
그런 시간에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름이 없다.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의 여름 해질녘, 강가 풀밭 위의 선명한 기억ㅡ오직 그것이 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에 하나둘 별이 반짝일 테지만 별에도 이름은 없다. 이름을 지니지 않은 세계의 강가 풀밭 위에, 우리는 나란히 앉아있다.
…..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너는 말한다.
“그럼,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는 진짜 네가 아니구나.” 당연히 나는 그렇게 묻는다.
“그래,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대역에 지나지 않아.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
…..
나는 네 어깨에 가만히 팔을 두른다. 너의 뺨이 내 어깨에 닿는다. 그러나 그 여름 해질녘에 내가 어깨를 안은 것은 진짜 네가 아니다. 그것은 너를 대신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
나는 안다. 그렇다. 내가 지금 가만히 어깨를 안고 있는 것은 너의 대역일 뿐이다. 진짜 너는 그 도시에 살고 있다. 내 손안의 어깨는 무척 매끄럽고 따뜻해서, 나는 진짜 너의 어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한 달에 한 두 번 너를 만나 얼굴을 보고, 단둘이 긴 산책을 하고, 여러 가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서로의 정보를 친밀하게 교환하고, 보다 깊이 알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는 나무 그늘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입술을 포갠다ㅡ그렇게 근사한 시간에 그 외의 요소를 성급하게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거기 있던 소중한 무언가가 망가져서,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신체적인 건 나중 일로 남겨두자.
…..
그런데 그렇게 이마를 맞대고서 우리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지금 와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써 내린 문장들은 고작 768쪽 중 첫 10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벌써부터 읽고 싶어지지 않는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독자들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가졌다. 지금 나는 이걸 다시 읽으면서도 소름이 돋는다. 마치 내가 그 세계로 첨벙 뛰어드는 것 같다. 책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여름에 뛰어드는 것 같다.
이런 문단들을 살펴보면 마치 이 책이 사랑 얘기 일 것만 같지 않은가? 절대 아니다. 이 책은 총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만 사랑을 다루고 2, 3부는 아예 다른 틀의 내용이다. 특히 2부는 거진 400쪽이 넘기 때문에, 책의 주 내용은 사랑이 아닌 주인공의 삶에 대한 얘기이다.
그럼에도 1부에 나오는 묘사들은 정말 마음에 든다.
Collection of Quotes & Analysis
“너는 여러 가지를 숨기지 않고 스스럼없이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내 생각에, 이 세계에서 마음속에 비밀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것이 사람이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모든 것을 꺼내서 보여줄 순 없다. 우리의 창피한 부분이나, 말하기 싫은 부분은 언제나 존재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말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몫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비밀을 만들고 나 자신을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솔직함을 강조한다.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당신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마음에 있던 비밀을 하나씩 까서 상대방에게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한 가지 우스운 점은 한 가지의 비밀을 깔수록 새로운 비밀들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그 사람을 믿고 자신을 믿어야 한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그러한 모습도 이해해주고 그 사람을 선택한 당신을 다시 한 번 뒤돌아 보며 그런 사소한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 사람에게 자신의 밑천을 다 드러내고 모든 것을 보여주기는 힘들다. 가족에게 또한 그러지 못하는데 당연히 쉽지 않다. 우리의 어릴 때를 생각해보자. 다들 한번씩은 사춘기 때 성적이 잘 안 나오거나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 있어서 부모님께 말씀 드리지 못한 적이 있지 않은가? 나는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 싫어서 유학 생활 동안 공부를 열심히 했다. 가족이 힘든게 없냐고 물어보면 힘든 건 없다고 했다. 그 어린 나이에 독립을 하고 다른 나라에서 새 환경에 적응하며 생활 했다. 따라서 힘든 건 많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사랑했기에 드러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 아파하는 걸 보는게 더 힘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 글은 내게 크게 와닿았다. 내가 그에게 공감하는 건지 그가 나에게 공감해주는 건지는 몰라도 큰 힘이 되었다. 마치 내 내면을 마주한 느낌이었고 나를 한번 더 돌아보고 나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네 ― 내가 여자의 반쪽밖에 보지 못했다는 걸. 여자는 늘 내게 왼쪽 얼굴을 보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어. 움직임이라고 해봐야 눈을 깜박이거나 이따금 보일락 말락 고개를 갸웃하는 정도야. 요컨대 지구에 사는 우리가 달의 한쪽 면밖에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여자의 한쪽 겉면만 보고 있었던 걸세."
결국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매우 단편적인 것으로 사랑의 정의하기에 급급하다. 친절하다. 일을 열심히 한다. 매력적이다. 글을 잘 쓴다 등등. 그 사람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정의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글을 쓰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우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을 열심히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는 결국 남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우리의 솔직함은 점점 더 비밀에 감춰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도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지에 관한 의문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모두 드러낸다고 해서 순수한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 모양은 정말 제각각으로 달라서 한 사람 만의 노력으로 온전한 사랑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서로가 맞추기 위해서 과하게 애를 쓰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키는 이런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이 ”저주“일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아마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사랑이 떠났을 때 비로소 내 삶이 비참해지기 때문에 그리 말하는 것이다.
마치며 ㅡ 나의 생각 정리
우리의 일상은 정말 너무 나도 바쁘다. 학교도 가야되고 과제도 해야하고, 작게 보면 화장실도 가고 밥도 먹고 사람들이랑 대화도 하고 지하철에서 쪽잠도 자고 하늘을 보며 멍도 때려보고 그런다…
이런 바쁜 일상 속에, 사랑하는 그 이는 나에게 스며들어야만 한다. 스며들지 않는다면 건강한 관계가 아니란 것이 내 생각이다. 스며든다는 것은 서로의 삶에 서로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믿고 사랑한다. 일상을 공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1순위에 둔다. 말을 꾸며가며 할 필요는 없다,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보여주면 된다. 우리의 마음 한 켠에는 뾰족한 모서리가 있다. 다른 사람이 툭 건드리면 베일만큼 날카롭다. 이런 모서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의해 형성 된다. 지친 하루들, 맘에 들지 않는 결과물들.. 그런 것들이 우리 마음의 모서리를 더욱 뾰족하게 만든다. 이 모서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니 그러면 안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껴주어야 할 존재다. 가끔 우리의 일상이 힘들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럭 화를 낼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 마음에 자리잡은 뾰족한 모서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서서히 깎아줄 것이다, 동글동글한 동그라미로. 왜냐면 사랑을 하면 아픔도 함께 하고 싶으니까.